韓기업 데이터센터·LLM 소극적
AI 투자액은 세계 11위 그쳐
민관 협력모델로 AI 전략 짜야
중국(1월 15일·연례 춘제 행사 참석)→대만(1월 16일·협력사 ASE의 자회사 공장 준공식 참석)→중국(4월 17일·허리펑 중국 부총리 면담)→ 일본(4월 20일·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AI 로봇산업 논의)→ 대만(5월 17일·대만 컴퓨텍스 참석).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올 들어 방문한 아시아 출장국 리스트다. ‘반도체 강국’이라는 한국만 쏙 빠졌다. 한국에는 대만 TSMC와 같은 핵심 공급망도 없고, 중국엔 흔한 대형 고객도 없고, 일본처럼 이렇다 할 정부 주도 신사업도 없기 때문이란 게 시장의 해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가 주도하는 인공지능(AI) 생태계에 한국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방증”이라며 “수없이 많은 AI 가치사슬에서 한국은 고대역폭메모리(HBM) 하나만 꿰차고 있다”고 말했다.
◇“AI 변방국 신세 될 수도”
업계에선 ‘대만은 뛰고 한국은 기는’ 지금의 기세가 몇 년 더 유지되면 한국은 ‘AI 변방국’으로 밀릴 것이란 우려를 내놓고 있다. HBM을 포함한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집중된 한국과 달리 대만은 AI 생태계 기반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대만에는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수탁생산) 업체인 TSMC만 있는 게 아니다. 반도체 설계 분야 1위(미디어텍)와 패키징 1위(ASE)도 모두 대만 기업이다. 폭스콘은 AI 서버 제조시장 넘버원이고, 에이스피드는 AI 서버에 들어가는 기판관리컨트롤러(BMC) 시장의 80%를 갖고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최근 10년간 AI 기술 트렌드를 제대로 읽지 못한 탓에 한 수 아래로 본 대만에 밀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오픈AI, 구글, 메타 등 미국 빅테크가 주도하는 AI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우리 기업이 맞붙는 건 힘에 부친다. 엄청난 자금이 들어가는 AI 데이터센터 건립도 부담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하드웨어부터 소프트웨어에 이르는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한국이 설 땅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정부 지원도 경쟁국보다 적어
한국의 AI 미래가 그리 밝지 않다는 것은 몇몇 숫자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산하 인간중심AI연구소(HAI)의 ‘AI 인덱스 보고서 2025’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AI 민간 투자 금액은 13억3000만달러로 11위에 그쳤다. 미국(1090억달러)은 물론 중국(93억달러)에도 한참 못 미친다. 문제는 없는 돈을 끌어모아도 시원찮을 판에 한국의 AI 민간 투자액이 전년(13억9000만달러)보다도 줄었다는 점이다.
업계에선 한국이 AI 시대에 밀려난 이유 중 하나로 정부의 무관심을 꼽는다. 대만 정부는 2017년 ‘TSMC 보유국’을 넘어 자체 AI 생태계 구축을 위해 ‘작은 나라를 위한 AI 대전략’을 선포하며 5억1750만달러 투입 계획을 밝혔지만, 한국은 지난해 들어서야 AI산업에 3조5000억원 투자 계획을 내놨다. 한발 앞선 대만은 지난해 11월 AI산업에 향후 3년간 매년 1조2000억원을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업계는 한국이 다시 일어서려면 민관 협력 시스템부터 손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 정부의 단기 공공사업으로는 제대로 된 AI 생태계를 구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롤모델은 대만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가 추진 중인 ‘제2의 TSMC 만들기’ 프로젝트다.
대만은 로봇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1987년 TSMC를 설립할 때와 똑같은 지원책을 펼치기로 했다. 정부는 전체 투자금의 30% 이하만 내고 나머지는 민간이 조달하는 방식이다. 경영에 일체 개입하지 않는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는 큰 그림을 그리고 초기 마중물 투자를 하는 정도에 그치고 될성부른 민간 기업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고급 인재 확보를 위한 국가 차원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대만은 해외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파격적인 세제 혜택 등을 제공하고 있다.